The way to use our psychological immune system★ 스크랩

Dan Gilbert asks, Why are we happy?










경각심 단상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너무나 뻔한 스토리 안에서 그에게 바른 충고를 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안됐고 나는 경각심에 머리에 날이 섰다. 그가 그 공동체 안에서 사실상 신 만큼 높아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대한 어려움과 두려움으로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 상황은 그의 위엄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그는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함을 뽐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잘못된 방향성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가 그걸 모를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 자신들이 모르는 그의 깊은 뜻의 실재를 상정해놓음으로써 자신들의 분별력을 외면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초심의 방향이 같고 삶의 비슷한 지점을 걷고 있는 분별력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 하에 나를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외의 요소들이 우리들의 방향성의 일치와 우연적인 처음의 마주침의 가치에 비해 얼마나 소소하고 극복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의무가 무엇인지 무섭게 깨닫는다.


- 단상

If you get too engrossed and involved and concerned in regard to the things over which you have no control, it will adversely affect the things over which you have control.
(만일 네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너무 몰입되고 걱정한다면 그것은 네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도 역으로 작용할 것이다.)


느낀점 단상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우리 집에서 맞는 오전의 햇살, 조금 지나면 또 얼마나 그리워질까.

집에 왔을 때 엄마 동생과 즐겨 보는 짝짓기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 보면 말썽을 일으키는 여러 유형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와 닿았던 하나는 통용되는 의미를 거부하고 자기 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형이다. 일주일 동안 열 명 남짓의 남녀가 합숙을 하면서 중간 중간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는데, 그 유형들은 그 순간에 장기화되지 않을 동정심을 발휘하거나 자신은 rule out할 사람부터 알아가겠다 등등의 이유를 대면서 마음에도 없는 상대를 선택함으로써 그로 인해 얽혀 버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가 하는 말만 들을 때면 '아 그런 깊은 뜻이 있구나' 싶다가도, 그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기엔 그로 인해 사실상 감정을 농락당한 사람들이 너무 딱했다. 자신 안에서는 완벽하게 선을 추구했던 법칙이 외부 세계로 나오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띠게 되는 것이 신기하다. 

의도마저 악한 사람들에 대처하는 일은 쉽다. 그래도 세상에는 그 악을 인지할 수 있는 선한 사람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한 의도를 가진 다수의 법칙들이 충돌하고 그 때의 심층적인 의도가 어땠든지 간에 그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받게 되어 버리고 나면 모든 것이 어려워진다. 나의 상황에서 일반적인 소통방식은 무엇이었으며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 스스로의 잘잘못을 가리고 벌한다기보다는, 그냥 알고 싶었다. 공연자가 그 실수만을 하지 말아야지 집착적으로 노력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서 여지없이 그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무력감처럼 나의 마음이 조금도 묻어나지 못했던 나의 행동에 대한 나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아쉬움 때문에 자학적으로 지나간 일을 수백 번 되돌려 보고 어떤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생각과 배려만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의 사고 체계에 오류가 있어왔고 그게 이 기회에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걸 고치려고 더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떤 새로운 관점을 취하더라도 더 이상 진실로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기억이 낡아버린 것 같다.

확실히 사랑을 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raw한 사랑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것을 개개인에게 꼭 들어맞는 방식으로 표현해주길, 나를 더 보여준 것에 대한 대가가 사랑의 형태로 반영되어 돌아오길 희구하는 것은 그 대상의 범위와 기대치에 개인차가 있을지언정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은 쉽지만 그 거리와 함께 보낸 시간에 걸맞는 사랑으로 관계를 가꿔나가는 것은 어렵다. 정말로 생명체를 가꾸듯 노력을 해야하고 유리처럼 소중히 다뤄져야 했는데 나는 그동안 그 필요성을 느낄만한 상황을 접해본 적 없이 너무나 쉽게 거저로 좋은 관계들을 얻어왔기 때문에 안이하고 미숙했던 것 같다.

Putting yourself in other's shoes라는 말. 이보다 매력적일 수는 없다, but if it's possible(!!!). 그런 시도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사실상은 불가능한 미션이고 자기가 들인 노력을 근거로 자신의 인식에 확신하는 그 순간부터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결코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알 수 없고 나의 인식은 그 능력 자체로도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이미 나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고작 세 문제를 맞추기 위해 강의록 하나를 다 봐야하듯이 사랑이라는 의지를 가지고 그 사람을 열심히 공부해야하는 거겠지.

처음에는 나랑 최대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나는 그렇게 살고 있었고 내가 접하고 즐기는 새로움도 언제나 완전한 이방인이나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처럼 다름이 최대한 존중받을 수 있는 한에서였다. 어른들만 해도 내가 예의를 갖추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먼저 다가갔다가 실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내가 다수 안에 속했을 때만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열릴 수 있고 그러는 것이 건강한 방향일 것 같다. phobia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겠다.


12/18 단상

나의 숙화 정도, 바로미터 외 적인 자격 조건 충족 속도보다 빠르게 벅찬 자격들이 주어지고, 책임감이 요구되고,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그래야 배우기도 하겠지만, 준비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너무 잘 느끼고 원치 않게 자꾸만 보게 되어서 불안하다. 누군가의 무방비로내게 허락된 살에 생채기를 낼까봐, 나의 역할에 걸린 기대와 사랑 때문에 불안하다.

인간은 언제부터 '공적인 관계'를 만들어 쓰게 됐을까? 아마 이전에는 관계라는 게 있을 뿐이지 태생부터 공적이거나, 사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 인간답다.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서로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고 더 기대하거나 실망하지 않는 깔끔하고 매우 편의적인 시스템이다. 거의 완전히 내어주고 포용하는 관계를 늘 가까이서 경험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배우고 익혀 온 것이 공적인 관계에서의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방법, 그래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엇나가지 않는 법이었기 때문에 전자의 존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후자의 방법을 모든 새로운 것들에 무분별하게 적용시키면서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편의를 위한 화폐수단이 고마움의 감정을 기호화시키고 이제는 그 기호만이 남아 그것을 통해 나누어야할 진짜가 설 자리가 없게 된 것과 같이 그렇게 잃어버린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섭다. 물물교환하고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법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것이 당연한 시대에서 충성심이 덜하면 내쫓아질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변할 수 있을까? 주어진 것들을 통해 배워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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